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유해 보존 과정
[이기명 신부 엮음,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유해 현황』에서 인용]
1846년 9월 16일 한강변 새남터에서 참수 순교. 순교 후 14일 만에 모래사장에 가매장되어 있던 시신을 파수병의 눈을 피해 이민식(빈첸시오)이 동료들과 함께 파내어 자신의 고향인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미산리에 모셔다 10월 26일 자기 선산에 안장하였다.
1901년 5월 20일 뮈텔 주교의 명으로 교회법원 판사 빅톨 뽀아넬 신부, 기록서기 폴로리아노 르망즈 신부, 안성 본당 안토니오 곰벨 신부, 미리내 본당 강도영 신부가 무덤을 발굴하고, 강도영 신부 방에 유골을 안치하였다가 5월 23일 용산신학교로 모셔온 뒤, 6월 23일 용산신학교 성당 제대 밑에 정식으로 안치하였다.
1950년 6․25사변이 일어나자 경남 밀양으로 소신학생들과 두개골 부분만 피난하고 나머지 유해는 용산 성직자 묘지에 숨겨두었다가 1953년 휴전이 성립되자 혜화동 소신학교(성신중고) 성당으로 모셔졌다.
1960년 7월 5일 혜화동 대신학교 대성당이 준공됨에 따라 대신학교 대성당으로 옮겨 모셨다. 이 때 하악골은 미리내 경당으로, 치아는 절두산 순교기념관으로 분리 안치되었다.
1983년 9월 30일 김대건 신부 시성 준비를 위해 김남수 주교, 김택구, 윤민구, 이정운, 한정관, 박준영, 이종남 신부 등이 참석한 가운데 유해 중 왼쪽 정강이뼈를 꺼내고 다시 봉안하였다.
1994년 2월 17일 유해를 보관해 온 관이 목관이어서 부식이 심해지므로 가톨릭 의대 해부학 교수팀이 와서 소독을 하고 강우일 주교님의 입회하에 김수환 추기경님이 봉인을 마친 후, 2월 21일 30×50×50cm 크기의 납관에 밀봉하였다.
1994년 2월 24일 오전 11시 대신학교 대성당에 현재처럼 새로 마련된 석관에 안치하여 공경하고 있다.